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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S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활동가, 쁘리앙카지의 이야기  

 

 

쁘리앙카지 약력   

19979월에 수자타 아카데미 첫 방문 후  

1997102일부터 마을 유치원 선생님  

19982월 수자타 유치원 선생님  

19986월 유치원 원장 & 수자타 아카데미 교사  

19997월 수자타 아카데미 교장  

6년간 교장을 맡은 후   

20062월 한국에 왔음  

20069월부터 20082월까지 서울 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공부  

20096월부터 201412월까지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52월에 인도로 돌아간 후 인도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음  

 



인도JTS에는 1997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인도 현지인 여성 활동가 쁘리앙카지가 있습니다. 인도 사회는 여전히 출생과 혈통에 의해 사회적, 직업적 계급이 결정되는 카스트 제도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 조혼금지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 여성들은 관습적으로 15-18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됩니다. 높은 카스트 여대생도 학교에 다니다가 집에서 내려와 결혼해라하면 다음 날 내려가 처음 본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이런 인도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가장 상층 계급인 브라만 고학력 여성이 22년이 넘는 시간동안 무보수 자원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높은 신분, 여성으로써 요구되는 사회적 기대를 저버리고 봉사하는 삶을 선택한 것은 엄청난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쁘리앙카지가 JTS 자원 활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그녀가 봉사하는 삶을 지속해가는 동력은 무엇인지?, 그녀의 지난 삶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지난 8월 한국을 찾은 쁘리앙카지, 그녀를 만나 파란만장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쁘리앙카지 집에서(뒤에 앉아 있는 학생들)

 

Q. 쁘리앙카지는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브라만에 속하고, 인도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고학력의 여성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외국 NGO 단체인 JTS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하게 됐나요? 

 

인도 가야 지역 마가드 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고향인 비하르주 빠레와 마을 부모님 댁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수자타 아카데미라는 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가 있는데 그곳에 일할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수자타 아카데미에 이력서를 보냈고 대학을 졸업한 조카인 스위티와 함께 19979월 수자타 아카데미에 처음 가게 되었어요. 그때 제 나이가 26살이었어요. 수자타 아카데미에 가서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어요. 인력 구성하는 방법, 마을 사람들의 협력을 끌어내고 활동을 지속해나갈 방법 등을 배웠어요. 교육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일주일 후 학습한 것에 대한 평가가 있었는데 저와 스위티가 1등을 했죠. 그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부모님 댁에서 마을 유치원을 열게 됐습니다. 우리 집이 마당도 넓고 집 양쪽에 방이 있었거든요. 일주일이 지난 후 학생 수가 300명이 되었어요. 그 후로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말마다 회의하러 수자타 아카데미를 가고.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유치원을 운영했습니다. 그렇게 JTS 활동을 시작했죠. 

 Sing & Dance Festival(앞줄 가장 오른쪽 쁘리앙카지) 

 

Q. 삶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JTS에서 활동을 하셨네요. 활동하면서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

 

19981JTS이사장 법륜스님을 처음 뵀을 때가 생각이 나네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던 날, 그때 옷을 안 입고 온 아이들이 많았어요. 스님께서 한 아이를 잡고 저와 교사들에게 물으셨어요. 이 아이가 누구 아이냐고요. 스님은 이 아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이의 엄마이고 아빠라고 하셨습니다. JTS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려운 사람들의 엄마, 아빠가 되는 일이라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지만 본래 내 것, 네 것은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내가 JTS에서 하는 활동의 의미를 스스로 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 것인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참 내 것, 네 것을 많이 따지는구나!’ 깨닫게 됐습니다. 

지금 학교 스텝으로 일하고 있는 아미타부지와 아짓지가 학교에 처음 왔을 때도 생각나네요. 1997년 처음 유치원을 개원 했을때 아미타부지와 아짓지가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에 입학했어요. 입학 당시만 해도 아미타부지는 이름이 없었죠. 당시에는 먼저 태어난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많이 죽었던 터라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 이름이 없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집에서 그냥 라고만 불렀던 거죠. 제 조카 스위티가 아미타부라는 이름을 지어줬답니다. 

  실무자들이 한국에서 왔을때 

 

Q. 카스트 제도와 여성 인권이 존중받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 속에서 JTS 활동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을 것 같아요. 그 어려움 속에서도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궁금합니다.

 

부모님 댁에서 유치원을 시작했을 때,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계급의 사람이 둥게스와리 사람들을 협박하고 노예로 부리는 일들이 많았던 터라, 둥게스와리 마을 사람들도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하루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갔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이들이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어요. 그러자 제가 자그디스푸르 마을에 아이를 팔러 갔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어요. 그리고 마을 아줌마들이 저를 질투해서 교사들이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술 마시고 옷을 벗고 춤을 춘다는 둥 나쁜 소문을 냈죠. 안 그래도 돈 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활동비 없이 어떻게 일할 거냐며 가족들이 반대했었는데, 마을에서 안 좋은 소문이 나자 반대는 더 거세졌습니다.  

학교에서 45일 수련이 있었어요. 5일째 되는 날 막내 오빠가 학교에 찾아와 활동을 그만두라고 화를 내며 저를 때렸어요. 제가 하나뿐인 여동생이라 평소에 많이 챙기고 예뻐했던 오빠가 제게 이렇게 화내고 때린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차라도 마시면서 JTS 활동을 그만두고 시집가라고 좋게 타일렀으면 마음이 흔들렸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오빠가 강압적으로 때리니 화가 나서 결심했어요.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고요. 안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 가족조차 반대를 하니 더 화가 났거든요.  

그리고 그 당시에 다섯째 언니가 시집을 갔어요. 그런데 언니가 시집에 가서 미움을 받고 고생을 엄청나게 했어요.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돈도 잘 벌던 언니가 시집을 갈때, 모두가 잘 살 것이라고 기대를 했거든요. 귀염받으며 행복하게 살던 언니가 결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 선주 법사님과의 만남이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롱치마를 입고 목에 카메라를 걸고 다니던 선주 법사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선주 법사님께서 결혼을 하지 않고 외국에서 봉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놀랐어요. ‘결혼을 안 해도 잘 살 수 있구나’, 법사님의 삶을 보며 나에게 요구되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구나’, 희망을 보았습니다. 결혼해서 괴로운 언니의 삶과 결혼하지 않고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사는 법사님의 삶이 대조적으로 느껴지며 결혼하지 않고 JTS 활동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결심했어요.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네요. 

 (왼쪽부터)공덕화보살, 쁘리앙카지, 선주법사 

 

 Q. 앞으로 인도JTS 활동 계획은?

 

지금은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에서 방치되는 것 같다는 문제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중학교를 기본 교과 과정만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처럼 기술학교를 운영하는 쪽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술학교가 아이들에게는 단지 기술을 배워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바르는 노동자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컴퓨터 수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것을 더 확대하여 높은 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등 이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똑똑한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인도JTS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아이들이 마을에서 취직도 하고 봉사도 하기를 바라요. 마을 개발 사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마을 개발 사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려면 아이들이 수자타 아카데미를 자기 학교, 우리 학교라고 느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 스스로 내가 좋은 교사가 되고 좋은 기술을 배워서 마을을 살리고 학교를 운영 해야겠다라는 이런 마음이 들게 할 수 있을까?” 이 점이 제가 생각하는 수자타 아카데미의 가장 큰 과제입니다. 학생과 학교, 마을 모두 상생할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쁘리앙카지가 선주 법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동안 꿈조차 꾸지 못했던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듯이 수자타 아카데미의 아이들은 쁘리앙카지를 보며 조심스럽게 새로운 삶을 꿈꿔나가고 있습니다. JTS가 하는 일이 단순히 수자타 아카데미라는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쁘리앙카지. 아이들이 인생의 방향을 잡아나가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쁘리앙카지가 있기에 수자타 아카데미의 장래는 밝습니다. 이상 JTS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활동가, 쁘리앙카지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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