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구호

 지난 4월 25일, 규모 7.8에 달하는 대지진이 산악국가 네팔을 덮쳤습니다. 많은 주민이 가족과 집을 잃고, 여진의 공포에 집을 버리고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JTS는 네팔에 인접한 인도에서 긴급구호팀을 파견하여 구호물자를 배분했습니다.

 

 함께하고 글쓴이 - 인도JTS 장도연 사무국장

 

 4월 25일 지진 당일, 갑자기 학교 건물이 흔들렸다. 학교 복도에서 시험감독을 하고 있던 교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수업하던 아이들을 모두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뛰어나왔다. 건물과 땅이 울렁거렸다. 그때, 네팔에서는 7.8의 강진이 왔던 것이다.

 

 26일 저녁에는 출발할 수 있는 간단한 준비를 하고, 27일 새벽에 한국인 활동가 1명, 인도인 활동가 1명, 총 3명으로 긴급구호팀을 꾸려 인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육로로 네팔 국경으로 향했다. ‘파트나’를 거치고, 국경도시 ‘락솔’을 거쳐 국경을 넘었다. 새벽 4시에 출발을 했는데도 네팔 국경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넘었다. 출입국 절차를 마치니 날이 어두워졌다.

 

 네팔 국경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4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출발했다. 국경도시 ‘빌 간지’에서 카트만두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가 산사태로 막혀, 산으로 산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 카트만두로 들어가야 했다. 우리를 태운 15인승 도요타 구식 승합차는 거의 곡예를 하는 것처럼 높은 산허리를 넘고 넘었다. 가는 길 내내 창밖 풍경을 보면서, 이곳에는 어떤 지진 피해가 있는지를 살펴보며 달렸다.

 

    ▲ 지진으로 무너진 주택. 산간에 벽돌로 지은 집이 많이 피해가 컸다.

 

 ‘헤타우드’라는 도시를 지나 카트만두로 들어갔다. 상태가 좋지 않은 산길에 쉼 없이 차들이 지나갔다. 카트만두로 들어가는 차들은 거의 없고, 차와 오토바이 대부분이 카트만두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잤던 숙소 직원도 사람들이 다들 카트만두에서 빠져나오는데 왜 카트만두로 들어가느냐며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오전 10시경, 카트만두 도시에 들어가니, 입구에 사람들이 많이 서 있었다. 승합차가 서자, 차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두 카트만두에서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가는 차편을 구하기 위해 들어오는 차가 있으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카트만두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먼저 카트만두 지진 피해 지역을 돌아보기로 했다. 길 양쪽 사이 사이에 건물이 넘어져 있고, 군인들이 굴착기로 현장 철거를 하는 곳도 보였다. 어떤 곳에는 아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엄마도 있었다. 넓은 공터에는 불안함에 집에서 잘 수 없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밖으로 나온 듯, 텐트가 즐비하게 서 있고, 상점들의 문은 거의 다 닫혀 있었다.

 

 카트만두에서 지진으로 인명 피해가 가장 많은 지역은 이미 군인들이 수색작업을 하고 있고 일반인의 접근은 막고 있었다. 인명 피해가 있는 가족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건물 안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진이 계속되고 있었고, 이미 금이 간 건물도 많아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후가 되니까 태연하게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혹시 현지에 먹을 것이 없을까 봐 사 왔던 달걀 20개가 무색하게, 과일 장수도 나타나고, 옥수수 파는 사람, 아이스크림 장수까지 나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넓은 공터엔 급식 줄이 길게 늘어서고, 곳곳에 급수 차량이 식수를 제공하고 있었다.

 

 지진이 나고 워낙 많은 인명 피해가 있어서 거의 죽은 도시와 같지 않을까 상상을 했었다. 국내 주요 일간지 뉴스엔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다는 기사까지 있어서, 거의 암흑의 도시를 상상하고 갔었다. 그런데 네팔 사람들은 내 생각과는 달리 밝았다. 서로 돕고 있었다. 텐트촌 주위의 쓰레기를 줍는 종교인들과 청년들도 있었고 서로 밥을 먼저 먹으려고 한다든지, 물을 서로 먼저 받으려고 하지 않고, 가지런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휘발유를 사기 위해 오토바이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도 소요가 일어날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29일 새벽, 카트만두 다음으로 피해가 크다는 이번 지진의 진원지 ‘고르카’ 지역으로 출발했다. 5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하니, 한국 구호단체와 한국 언론사 사람들도 보이고, 군인들, 네팔 지역 NGO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러나 피해를 당한 마을은 사륜구동 차량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고, 걸어서 2~3일은 가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은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군인들이 산사태 난 곳을 수습하기 위해 들어갔다고 했다. 식량은 헬기 3대로 공급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로 들어갈 수 있는 만큼만 들어가서 직접 걸어갔다. 직접 마을의 집집이 들어가 상황을 살펴보았다. 밖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집도 들어가서 보면 대부분이 다 금이 가 있었다. 네팔 사람들이 산간지역에 많이 살고 있고, 집들은 대부분이 흙과 돌로 지어져 있어 피해가 더 컸다. “집이 무너질까 두려워서, 우리가 염소 집, 닭집에 살고 있어요.” 하며 사는 곳을 보여주는 사람들. 집에 들어가서 살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30일 새벽, 고르카에서 ‘포카라’쪽으로 한 시간 넘게 떨어진 ‘하르비’로 갔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간 후, 3시간을 걸었다. 그곳은 고르카 지역보다는 피해가 적었다. 다시 5시간 정도 차를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와, 카트만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박타푸르’ 답사를 했다.

 

    ▲ 잔해 정리작업을 돕고 있는 JTS 봉사자들

 

 박타푸르는 고대 도시로, 네팔의 3대 관광 도시 중 하나였다. 이곳은 오래된 건물이 많아 피해가 훨씬 더 컸다. 벽돌집들이 대부분 무너지고, 무너지지 않은 집들도 곧 무너질 듯 서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집 주변 공터로 나와서 밥을 해 먹고 있었다.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이 식량과 천막이었다. 이들은 못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식량, 옷가지며 모든 것이 무너진 집 속에 들어 있어 하루아침에 이재민이 된 사람들이었다. 카트만두나 고르카는 우리가 피해 지역, 피해당한 사람들에게 바로 접근하기가 어려웠는데, 이곳은 우리가 바로 접근해서 사람들의 삶을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부터 바로 조사 작업에 들어갔다. 두 명은 현장에서 조사작업을 하고, 한 명은 시장에 가서 주식인 쌀과 렌틸콩의 시장조사를 했다. 실제 쌀을 살 수 있는지,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쌀을 살 수 없다느니, 쌀 가격이 3배 이상이라느니 하는 떠도는 말들을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들리는 이야기와는 달리, 식량이 재래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상점들이 하루가 다르게 활성화되고 있었다.

 

 우리 긴급구호팀이 네팔과 거의 같은 문화권인 인도에서 왔기 때문에 힌디어가 통하다 보니, 다른 단체들보다 훨씬 쉽게 현장 곳곳에 접근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박타푸르 지역 NGO 회원 한 분을 만났고, 그분이 박타푸르 곳곳을 안내해 준 덕분에 더 쉽게 조사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구호물자를 어느 가구는 주고 어느 가구는 안 줄 수 없으므로, 개별 가구에는 식량 지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단체로 급식하는 곳만 찾아다니며 실제 식사하는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하루 식량이 얼마나 필요한지 세세하게 조사해 들어갔다. 어제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팀은 아침에 시장으로 식량을 구매하러 가고, 한 팀은 다시 현장 조사를 했다. 오후에는 가지고 온 식량을 배분했다.

 

 5월 1일, 인도에서 한국인 활동가와 인도인 활동가 5명이 추가 파견됐다. 훨씬 힘이 실렸다. 그래서 한 팀은 박타푸르에서 5일간 우리가 파악한 단체 급식소를 대상으로 일주일간 쌀과 렌틸콩을 지원하고, 또 한 팀은 다른 곳으로 답사를 다녔다.

 

    ▲ 인도JTS 긴급구호팀 활동가들

 

 ‘붕그마띠’, ‘코크나’ 지역은 다 같이 답사를 했다. ‘카브레 레왈리’ 지역도 3번에 나눠서 답사했고, ‘카브레 만단’ 지역은 5명이 인도로 돌아간 후, 한국인 2명이 5시간을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답사를 다녔다.

 

 5월 12일, JTS 박지나 대표님이 현지에 와서 같이 답사를 나가는 길에 규모 7.4의 강진이 왔다. 두 번째 강진에 사람들이 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첫 번째 지진 이후 문을 열었던 상점들도 대부분 다시 문을 닫았다. 지난 지진으로 무너지지 않았던 집들이 이번 지진에 상당수 무너졌다.

 

 방에 누워 있으면 침대가 흔들렸다. 여진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되었다. 네팔 사람들은 두려움에 힘들어했다. 우리가 차를 빌렸던 운전기사의 여동생은 두 번째 지진 이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진 3일 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있었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 두렵고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것이다. 여진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박타푸르에는 주로 식량 지원을 하고, 카브레 레왈리 지역에는 천막 500개를, 카브레 만단 지역에는 천막 200개와 식량을 지원했다. 5월 15일, 우리는 육로로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인도에서도 얼마간은 계속 마음이 쓰였다.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지거나 바람이 불면, ‘네팔에도 비가 올까?’, ‘혹시 여진이 오지는 않았을까?’ 마음이 네팔 쪽으로 자꾸 달려갔다.

 

 원래 네팔은 6월 중순 이후가 되어야 우기가 오는데, 벌써 조금씩 비가 온다고 한다. 이상기후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바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기가 되면 더 힘들어질 것이다. 우리도 우기가 지나면 네팔 재건사업에 대해서 논의를 할 것이다.

 

 우리의 작은 정성, 작은 관심이 필요하다. 그것이 그들에겐 큰 희망이 될 것이다. 마음으로, 직접 실천으로 네팔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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